부끄러움을 아는 사람 (에스라 9:1-8)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



말씀: 에스라 9:1-8

1 이 일 후에 방백들이 내게 나아와 이르되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 백성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가나안 사람들과 헷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과 여부스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모압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2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3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 4 이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가 사로잡혔던 이 사람들의 죄 때문에 다 내게로 모여오더라 내가 저녁 제사 드릴 때까지 기가 막혀 앉았더니 5 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 채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6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7 우리 조상들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우리의 죄가 심하매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우리 왕들과 우리 제사장들을 여러 나라 왕들의 손에 넘기사 칼에 죽으며 사로잡히며 노략을 당하며 얼굴을 부끄럽게 하심이 오늘날과 같으니이다 8 이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잠시 동안 은혜를 베푸사 얼마를 남겨 두어 피하게 하신 우리를 그 거룩한 처소에 박힌 못과 같게 하시고 우리 하나님이 우리 눈을 밝히사 우리가 종노릇 하는 중에서 조금 소생하게 하셨나이다


[서론]


사람은 살면서 좋은 일을 만나면 기뻐하고 슬픈 일을 만나면 아파합니다. 기쁘고 아픈 마음은 인간에게 감성과 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감성과 양심이 움직일 때에 인간 내면의 본성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 중에 또 하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할 때에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원하지 않지만 살다보면 부끄러운 일을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분의 말입니다. 아내 때문에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라고 합니다. 아내가 노름을 너무 좋아해서 벌써 몇 번째 경찰서에 벌금을 내고 데려왔다고 합니다. 경찰서를 갈 때마다 얼굴을 들지 못한다고 합니다. 또 어느 분은 자식 때문에 경찰서를 들락거리기도 합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경찰서를 들락거리면서 수모를 당하니 창피해서 죽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사람은 내가 원하지 않아도 창피한 일들을 경험하곤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부끄러운 일을 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뻔뻔한 사람을 두고 ‘철면피’라고 합니다. ‘철면피(鐵面皮)’는 ‘쇠로 만든 낯가죽이라는 뜻입니다. ‘철면피’라는 말이 나온 유래가 있습니다. 옛날 송나라에 출세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왕광원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보다 높은 사람이라면 그 앞에서는 낯이 간지러울 정도로 아부를 떨었습니다. 어느 날 한 관리가 술에 취해 채찍으로 그를 때리자 그는 ‘때리세요. 매는 때리라고 있는 것이니 기꺼이 맞겠습니다.’ 라고 했답니다. 화를 내기는커녕 ‘헤헤’ 웃으면서 고관의 비위를 맞추었습니다. 이를 본 사람들이 ‘저 사람 낯가죽이 철갑을 두른 것 같이 두껍다.’ 한데서 유래된 것입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짐승은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그래서 짐승은 대소변을 아무데서나 봅니다. 사람의 사람됨은 부끄러움을 알 때에 비로소 ‘사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인간에게는 거룩한 수치감이 있어야 합니다. 군자의 덕 중에 ‘수오지심(睡惡之心)’이 있습니다. ‘악을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을 말합니다. 잘못된 일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군자(大人)의 마음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입니다. 돈이 많거나, 학식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잘못을 저질렀을 때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입니다.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구할 줄 아는 사람, ‘미안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고 돌이킬 줄 아는 사람은 진정 용기 있는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정말 괜찮은 사람입니다. 정말 하늘의 복을 받을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진정한 사람다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문제는 무엇을 부끄러워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가난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닙니다. 게으른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부자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부정한 방법으로 모은 불의한 재물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학벌이 좋지 못하다고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체구가 작고 용모가 못생겼다고 부끄러워하는 분이 있지만 그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렇게 만든 것도 아닙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입니다. 정말 부끄러운 것은 마음이 좁은 것입니다. 마음이 좁아서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화를 내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좁아서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정말 부끄러운 것은 마음에 죄가 가득한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독일에서 부흥회를 인도할 때의 일입니다. 이 목사님을 안내하던 집사가 작은 마을을 지나면서 하는 말입니다. “목사님 바로 저 집 대문 있잖아요. 언젠가 밤중에 제차로 대문을 받아 부쉈는데 아무도 보지 않았기에 천만 다행이었어요.” 하면서 “할렐루야”를 덧붙였습니다. 신앙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습니다. 오늘날 교인들이 생활 속에서 잘못과 실수를 범하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할렐루야와 은혜란 말을 사용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더 거짓말을 잘하고 엉터리라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믿는 자는 더욱 조심하여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분명히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행24:16).”


오늘 본문은 에스라 선지자의 회개기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바벨론에서 종노릇을 하다가 해방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감사한 일인가를 잘 압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가나안 원주민들과 섞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나안 원주민들은 우상을 섬기는 백성입니다. 그래서 절대로 그들과 섞이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절에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이 행하던 가증한 일들을 행했다고 말씀합니다. 구체적 내용은 2절에 있습니다.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이런 말을 들은 에스라는 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


본문에서는 부끄러운 일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가나안 원주민들의 아들과 딸을 아내와 며느리로 삼은 것입니다. 혼혈이 되었습니다. 가나안의 사람들과 섞이지 말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우상들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관계에서 돌이킬 수 없는 길이 우상숭배 하는 자들과 같이 혼혈하는 길입니다. 그들은 수많은 우상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알이나 아세라와 같은 신들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과 결혼할 때에 그들의 신들을 가지고 옵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서 그들과 혼인을 하지 말라고 아주 강조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우상을 섬기는 가나안 원주민들과 혼인을 했습니다. 이것을 알고 에스라 선지자는 가슴을 치면서 통곡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아합이라는 왕은 시돈의 왕 엘바알의 딸 이세벨이라는 여인과 결혼을 합니다. 이세벨은 자신이 섬기던 우상인 바알과 아세라 신들을 이스라엘에게 섬기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 흉년이 들고 나라가 피폐해집니다. 나중에 이세벨은 비참하게 죽습니다. 개들이 그의 피를 핥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십계명의 제 1계명이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입니다.


둘째는 방백들과 고관들이 죄를 짓는데 으뜸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방백들은 높은 사람들입니다. 방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섞이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이 더 먼저 섞이는 죄를 짓고 있다는 것에 에스라는 놀랐습니다. 이들은 그런 악한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부끄러움을 몰랐습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을 보면서 에스라는 너무나 놀라 가슴을 치면서 통곡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목사님이나 장로님이나 직분자들은 솔선하여 죄를 짓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불신 결혼을 하여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기까지는 힘듭니다. 이런 게으르고 식어진 행동과 결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바르게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버려야 합니다.


결국 에스라는 너무나 부끄러워서 다음과 같은 행동을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었습니다. 손을 든다는 것은 항복의 표시입니다. 죄를 지은 그들은 부끄러운 것조차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에스라가 대신 손을 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에스라가 회개하는데 솔선하자는 것입니다. 둘째는 너무나 부끄러워서 낯을 들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에스라는 죄를 죄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얼굴을 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많은 사람들은 죄를 죄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습니다. 내가 모범을 보여야 자녀들과 주위의 분들이 천국가지 않겠습니까? 나의 모습을 보고 가족들이 저렇게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셋째는 우리의 죄악이 너무나 많아서 정수리에 넘쳤다고 고백합니다. 정수리는 머리 꼭대기를 말합니다. 머리 꼭대기라는 말은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을 정도로 죄를 짓는 도가 넘은 것을 말합니다. 도가 넘치도록 죄를 짓고 천국에 갈 수 있겠습니까? 넷째는 우리의 허물이 너무나 커서 하늘에까지 미쳤다고 고백합니다. 이제 정수리를 넘어서 하늘에까지 도달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진노밖에 남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을 받은 것이 사실이라면 이런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늘 울어도 못 갚을 줄 알아......”


다섯째는 역사적으로 이 사건을 보고 있습니다. 과거에 잘못해서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남유다는 바벨론에 팔렸습니다. 그 이유는 택한 민족이 우상을 숭배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놓고 또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에스라는 정말 답답해 합니다. 이렇게 가면 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셨다가 이제 긍휼이 여겨 주셔서 좀 숨 좀 쉬게 하여 주셨는데 정말 이럴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잠시 동안 은혜를 베푸사 얼마를 남겨 두어 피하게 하신 우리를 그 거룩한 처소에 박힌 못과 같게 하시고 우리 하나님이 우리 눈을 밝히사 우리가 종노릇 하는 중에서 조금 소생하게 하셨나이다”(스 9:8)


[결론]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배가 고픈 우리나라를 하나님이 살려주셨는데 어찌 우리가 하나님을 잊을 수 있습니까?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우리가 어찌 게으를 수 있습니까? 어찌 기도를 게을리 할 수 있습니까? 전도 한 명 못할 수 있습니까? 말씀을 통해 경고할 때 회개해야 합니다. 거듭되는 경고에도 이를 외면하고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환난의 때가 임박한 이 세대를 향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치십니다. 그 말씀을 듣고 믿음 안에 바로 서지 않으면 우리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한번 힘들어도 말씀대로 살아갑시다. 정직한 믿음으로 달려갑시다. 그것이 우리가 복을 받는 바른 길입니다. 특별히 사순절 기간에 죄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품지 말아야 할 것을 품지 않고 사심으로 은혜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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