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성장을 이룹시다

영적인 성장을 이룹시다



말씀: 히브리서 13:11-16

11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4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서론]


인생에서 무엇이 소중하냐고 묻는다면 ‘인생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제일 소중하다’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은 10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곧 11월이 되고 교회적으로는 마지막 달입니다. 올 한 해 어떠셨습니까? 힘드셨을 수도 있고, 계획대로 잘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힘들고 일이 안 되었다 해도 그 어려움 때문에 기도 많이 하고 하나님과 가까워졌다면 성공한 해입니다. 반대로 일은 잘 되고 돈을 벌었다고 해도 하나님과 멀어졌다면 퇴보한 해일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성장에 관심을 두고,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 힘쓰고 애써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영혼의 문제입니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은 사람은 결국에는 잘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다.’ 이것이 참 어렵기도 합니다. 죄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막히게 하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인간의 악함, 죄악을 짐승을 잡아 짐승의 피로 속죄를 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것이 약효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피 흘리셔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사해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습니다. 만고불변의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 관계가 좋고 영적 성장을 이룰 수 있습니까?


1. 죽음의 정신으로서 영적으로 성장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가 아니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입니다. 누구든지 죄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죄인임을 고백하고 회개함으로 용서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의 말씀을 보면 예수를 믿어도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를 설명하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를 바로 믿어야 한다는 것이 히브리서 내용입니다. 1장부터 4장까지는 정말 위대하신 예수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장은 선지보다 높으신 예수, 2장은 천사보다 높으신 예수 그리고 3장은 모세보다 높으신 예수, 4장은 여호수아보다 높으신 예수를 설명합니다.


5장에서는 예수님은 이런 분이시니 예수를 배반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6장은 이런 예수님을 믿고도 타락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음을 말씀합니다. 7장부터 10장까지에서는 다시 예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신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7장은 대제사장 예수, 8장은 언약의 예수, 9장은 하늘 성전, 세상 성전 10장은 제사장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11장은 믿음장으로 잘 믿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2장은 정말 어려움이 있더라도 소망을 가져야 함을 말씀하고 오늘 본문인 13장은 우리도 주를 위하여 고생 좀 해야 함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를 믿으면서 어떻게 고생하려고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고생 없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는 신앙의 영적 역동성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삼손이 드릴라에게 반하여 머리를 깍인 것처럼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사회적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남북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하고 새로운 국면으로 통일이 다가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독일에서 통일을 위하여 기도한 것처럼 우리도 가슴 설레며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간절한 기도를 한다는 소문은 많이 들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2.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함으로 영적으로 성장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고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성적 사고가 너무 강해졌습니다. 지식이 더 중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의식이 약화되었습니다. 현실 의식이 너무 강해졌습니다. 신앙의식이 약화된 것입니다. 역사적 사고가 너무 강해졌습니다. 초역사적 사고가 없어졌습니다. 기적이라는 용어가 사라졌습니다. 현재 의식이 너무 강해졌습니다. 소망의 의식이 약해졌습니다. 내일의 부유함보다는 오늘 당장 한 푼의 부가 더 중요합니다. 요즘은 목사가 되겠다는 청년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고생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저는 평택대학교에서 시간강사, 겸임교수를 15년 했습니다. 예전에는 학생들에게 교육전도사 자리를 마련해 준다고 하면 눈빛을 반짝였는데 요 몇 년 사이에는 신학생들도 교육전도사를 안 하려고 합니다. 적게 배워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지식이 없어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현실 의식이 너무 강합니다. 이성의 의식이 너무 강합니다.


현실의식이 강하니 예배생활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이성 의식이 너무 강하여 신앙 의식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신앙 의식이 풍부하여야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한 것입니다. 이성적 의식도 필요합니다. 이성적 의식이 없는 성도는 잘못된 성도입니다. 이성적 의식이 없는 목사는 잘못된 목사입니다. 그러나 조화가 필요합니다. 이성적 의식과 초월의식의 조화가 필요합니다. 역사적 의식과 초월의식이 필요합니다. 이 둘이 합하여 결과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이성적인데 치우쳐 있지 않을까요. 너무 이성적입니다. 너무 현실적입니다. 너무 현세적입니다. 우리 통합 측 목사님들이 제일 똑똑합니다. 균형도 잡혀 있습니다. 그러나 균형, 균형 하다가 영적 역동성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요.


신앙생활하는데 빠지지 쉬운 함정이 있습니다. 균형이라는 말입니다. 균형은 참 좋은 말인데 균형을 주장하면 이성으로 쏠립니다. 현세적으로 쏠립니다. 그래서 영적 역동성을 상실합니다. 영적 역동성을 잃고 삼손 같은 교회가 됩니다. 인간은 스스로 이성적인 측면과 영적인 측면의 균형을 맞춘 적이 없습니다. 역설적이지만 한쪽으로 쏠려야 진정한 균형을 갖출 수 있습니다. 이성적 사고와 영적 사고 사이에 극단적인 처방이 있고서야 사람들은 영적 의식을 갖게 됩니다. 옛날에는 사람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극단적인 처방을 했습니다. 그 지방의 귀한 짐승을 잡았습니다. 처절한 행위였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고생을 하셨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히 13:12) 예수님은 성문 밖에서 우리를 위하여 모욕을 당했습니다. 성문 밖에서 우리를 위하여 침 뱉음을 당했습니다. 성문 밖에서 십자가에서 못 박혔습니다. 정말 끔직한 일이이었습니다. 정말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떨리는 일이었습니다. 십자가를 묵상하는 일이 영적 성장을 이루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중한 고통을 받으셨는데, 이것이 대하여 우리는 진실하여야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진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귀한 것이 진실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막상 진실하려면 우리가 어떤 범위까지 진실하여야 하는지요. 반드시 진실하여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정말 진실을 잃어서는 안 될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진실입니다. 이에 대한 진실,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의 죄로 인한 것입니다. 죄는 어디에서 발생하는 것입니까? 죄는 이성 의식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현실 의식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현재 의식에서 죄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신앙 의식은 소망 의식인데 소망 의식이 없어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반드시 계신다는 신앙 의식이 아니면 죄에서 떠날 수가 없습니다.


의식이 전환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죽었다는 것을 믿고 이성 의식에서 신앙 의식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의식에서 내일의 의식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느 정도 수준으로까지 의식이 전환되어야 할까요? 오늘 성경 말씀에서 그 수준을 결정하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이 말이 전적으로 수용되어야 구원이 완성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정말로 믿음으로 예수님이 남기신 고난, 예수님의 복음을 위한 고난을 나눌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3. 수치가 아프지 않을 때 영적으로 성장합니다.
오늘 본문의 13절입니다.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내가 좀 부끄러움을 당하면 어떤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들어야 합니다. 전도하는데 내가 좀 쪽 팔리면 어떤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좀 비난하면 어떤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고난을 당하셨는데 내가 고난을 당하면 어떤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나도 고난당하리라 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 하는 마음이 생겨야 하는 것입니다. 주를 위하여 좀 고생하라는 이야기는 율법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것에 대하여 진실하려고 발버둥 치면 영적으로 성장합니다. 놀랍게 성장합니다. 놀라운 축복을 받습니다. 십자가의 보혈의 피는 하나님과 막힌 사이를 뚫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부흥을 멈추었다고 합니다. 헌금이 줄어들고 교회는 붕괴된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예수님 중심, 십자가 중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느 정도까지 고생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 나도 고난당하리라, 죽으면 죽지 뭐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을 가지면 길이 열립니다. 놀라운 발전을 이룰 수 있습니다. 기도응답이 있습니다. 기적이 나타납니다. 부흥이 일어납니다. 천성교회는 부흥하여야 합니다.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무엇을 하려면 부끄러움을 무릅써야 합니다. 간절하여야 합니다. 그냥 간절한 것은 효과가 없습니다. 너무나도 간절해야 합니다.


[결론]


칼 바르트 목사님은 “신앙은 하나님 중심, 십자가 중심입니다.”고 말씀했습니다. 십자가 사건으로 우리가 달라지지 않으면 무서운 현실이 우리를 집어 삼킵니다. 역사적으로 전쟁이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멸망길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설프더라도 십자가 신앙으로 무장하려고 하였을 때는 큰 축복이 있었습니다. 십자군 전쟁이 그렇습니다. 십자군 전쟁은 기독교인이 실패한 전쟁이었습니다. 성지 순례 못한다고 벌인 전쟁입니다. 많은 질문이 생기는 전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전쟁으로써 동서양의 서열이 바뀌게 하셨습니다. 오늘날 동서양의 구도는 십자군 전쟁 이후에 설정된 것입니다. 사람 위에 사람 없습니다. 우리는 다 평등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은 다릅니다. 십자가를 내 십자가로 생각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은 다릅니다. 주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나도 주를 위하여 수치를 당하자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생각하고 나의 수치가 수치로 여겨지지 않으면 영적으로 성장한 것입니다. 그러면 운명이 바뀌는 것입니다. 기적이 나타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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